본문 바로가기
정치 경제 문화 및 역사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던 양반과 노비의 관계

왕조 500년 역사를 가진 조선은 이성계의 쿠데타로 인하여 1대 태조부터 27대 순종까지 1932년 조선이 와해될 당시 약 10%의 양반과 90%의 일반 평민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드라마나 영화 속의 웅장하고 멋들어진 조선 모두 허구라고 보시면 됩니다. 10%의 양반을 위해 90%의 백성들이 떠 받들어 돌아가는 세상에서 드라마의 내용처럼 양반과 평민 간의 갈등이나 서로의 이해가 얽히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조선의 10%의 양반과 90%의 평민과 노비

당시 조선을 방문하여 조선을 경험한 외국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거리에는 온갖 오물과 배설물 등이 널려 있고 악취가 심했으며 술에 잔뜩 취한 양반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거리에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는 기록들을 남길 정도로 10%의 양반들은 자신들의 부만 축적하기만 하고 사회 질서나 민생에 관한 일은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법적으로 따져보면 당연히 양반도 세금을 내야 했지만 대부분 성실히 이행하지 않았고 평민들은 세금을 낼 수 없을 만큼 가난하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으면 빚을 져야 하는, 너무나도 형평성이 없는 사회에서 평민들은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평민들은 빚을 지게 되면서 가지고 있는 땅들을 양반들에게 헐값에 팔게 되고 자신이 판 땅에서 농사를 짓고 땅 임대료로 수확물을 갖다 받치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이죠.

국민들은 점점 더 가난해졌으며 양반들은 계속해서 부유해져 가던 1750년은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1825년에는 증기기관차가 발명되는 시대였습니다.

관련된 다른 글 보러 가기

독립운동가 김구가 영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조선시대-당시-평민들-생활-모습
조선시대-당시-평민들-생활-모습

 

한 나라의 부의 상위 10%를 차지하는 세력들인 조선의 양반들은 덩어리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들에겐 오로지 권력과 특권만 생각을 할 뿐 나라를 발전시키는 것에는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선왕조 100년 동안 조선은 아무런 발전도 없이 제자리걸음만 걷고 있었으며 법을 어겨도 처벌을 받지 않는 양반들은 노비 여성들을 강간과 겁탈하는 것은 기본이고 어린 노비까지 성노리개로 부리는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매독에 걸리기 십상이었으며 이것이 악화되어 전염병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왕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는데요.
궁녀들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이미 다른 남자들과 문란한 성 접촉을 한 상태였기에 남들도 쉽게 매독에 걸릴 수 있었다는 것을 1438년의 기록을 보면 우리가 존경하고 있는 세종대왕이 매독에 걸렸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를 보면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노비 부부가 딸자식을 낳으면 첫 생리도 시작하기 전에 주인집 양반이 겁탈을 하고 이에 대해 하소연을 하면 노비 부부를 그냥 죽이는 일들이 다반사였던 조선은 지금의 공산주의인 북한과 전혀 다를 게 없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핍박을 받고 있는 평민들과 노비들은 일본의 침략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도 역사기록에 잘 나와 있지만 모든 역사는 국뽕이 우선이기 때문에 치부를 드러낼만한 것들은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금기시하고 있는 것이죠.

또한 유교적 사상으로 인해 목욕을 하는 것도 1년에 몇 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양반들 조차 피부가 각질처럼 갈라져 있었고 상추를 풀면 쌀알이 쏟아지듯이 이가 떨어질 정도로 위생이 안 좋았다고 합니다.

 

관련된 다른 글 보러 가기

조선시대 백성들이 가난했던 이유

 

 


이렇게 국민들을 핍박하고 사람이 살아갈 쾌적한 환경을 만들지 못하는 국가에서 살고 있는 조선의 국민들은 일본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재산을 다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양반들에게는 '일본의 침략'이고 위생환경이 좋지 않아 자신들의 군대에 피해가 갈까 봐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들마다 기생충을 퇴치시키고 일정한 장소에만 용변을 보게 하는 계기로 조선의 국민들은 핍박하는 양반들에서 해방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일본이 조선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한국 역사책에는 일본이 조선을 쳐들어와서 강간을 일삼고 보이는 대로 죽였다고 하지만, 그런 사건은 일본 본토의 침략에서가 아니라 일본 도적단들의 만행이며 일본에서 정식으로 침략을 하여 넘어왔을 때는 전염병으로 인한 병력 손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여 강간을 하는 병사는 그대로 참수형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독이 이미 만연하여 부부간 성관계도 힘든 상황인 점을 봐도 우리가 만들어낸 일본에 대한 허구적인 면을 볼 수가 있는 것이죠.

또한 임진왜란 때 일본은 엄청난 진격 속도로 개성까지 진격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무리 빠른 말과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제대로 길이 나 있지 않았던 시대에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렇게 발리 진군을 할 수 없었던 것인데요.
이 부분도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이 다다르는 마을마다 조선인들은 두 손을 들고 환영을 해주고 가는 길목마다 자세하게 가는 길을 인도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양반들의 억압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싶었으면 하는 마음이 보이는 부분인데요.
또한 일본의 체계적인 군대의 질서에 의해 함부로 조선인들을 해하지 않고 정확한 기준에 의해 범법행위를 한 자만 벌을 내리는 것을 보고 조선인들은 더욱더 일본 군대를 환대하였다고 합니다.

 

관련된 다른 글 보러 가기

강간의 왕국 조선시대 _양반들의 성 인식


아마도 "이게 나라다"라고 생각을 한 것이겠죠.
그 당시 일본 군인들이 함부로 강간을 하지 않은 것은 매독과 전염병 때문이지, 그들이 진정 군인다운 군인정신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지만 조선 국민들은 그 정도의 하대에도 감격을 할 정도로 살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정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국의 역사 측면에서 보면 어떻게 해서든 합리적인 근거를 만들어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명분을 만들어야 하지만 너무나도 명백한 부분이라서 아예 언급조차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서의 제일 큰 이슈였던 임진왜란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책 안에는 단지 한 두 페이지의 내용만이 있을 뿐이죠. 그냥 대충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넘어가면서 시선을 돌릴 매개체를 '이순신'을 만든 것입니다.

영웅을 만들어야 민심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기득권 세력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런 이유로 인해 현재 이순신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역사학자들의 소리가 나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모두 바로 잡게 되면 한국의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기 때문에 정식적인 절차에 의한 검증은 절대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의 오명을 남긴 것은 일본의 침략을 환대한 조선 국민이 아니라 조선 국민들이 일본 군대를 환대하게 만든 조선의 양반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유교사상은 아직도 우리 문화에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상태로 아직도 버려야 하고 개선해야 할 문화적 의식이 많다는 것 알았으면 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