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미국이 한국을 도와준 이유와 북한이 생긴 이유
미국이 자국의 군인들과 물적 자원을 의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전쟁에서 우리의 편에서 싸운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신세대 젊은 세대들은 좌편향의 교육을 받았기에 더욱더 알 수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6.25 전쟁의 발단의 배경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인 미국이 우리가 침공당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서둘러 참전을 선언한 이유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요. 먼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2차 대전의 끝을 알리는 두 방에 핵폭탄의 일본의 폭격 한 뒤 항복을 선언하고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한민국의 자주적인 광복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반도 분쟁의 씨앗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때 소련은 공산 세력을 빠르게 확장해 미국을 압박을 전방위로 하고 있었는데요.
이미 일본은 항복한 뒤였지만 소련은 일본의 잔당 세력을 없애고 한반도의 치안에 유지하겠다는 좋은 명분을 내세워 한반도에 개입을 하게 되고 미국이 혼자 일본을 정리하게 놔두면 일본 전체를 미국이 쥐락펴락 하게 되는 상황이 올 것임을 감지하고 최대한 개입을 하여 미국이 일본에 대해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소련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소련은 남은 일본군을 정리하겠다고 하면서 중국과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미국은 종전 마무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터라 뒤늦게 소련의 의중을 알아차렸고 이에 대한 방비책을 세웁니다. 이러다가 소련이 한반도를 넘어 일본까지 쳐들어 올 것이 너무 뻔해 보였기 때문이죠. 미국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손에 들어갈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급하게 한반도에 미군을 주둔시킵니다.
소련이 만들어 낸 인물 김일성과 남침 야욕
한반도와 일본은 소련을 태평양 쪽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사수해야 하는 위치이지만 소련은 한반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은 한반도 가운데에서 만나서 서로 마찰이 없도록 합의를 하게 되었고 그 지점이 바로 38선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한반도의 정치인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념 대립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소련은 38도선 이북 지역에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시켜 이북지역 자산가들을 숙청하고 토지를 국유화시켰고 남쪽 지역에서는 민주주의 이념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나라를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측에는 이승만 정부가 만들어 졌고 북측에는 김일성이 독재 기반에 다 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천년 가까이 단일 국가로 존재하던 한국은 반으로 갈라져 각각 무력 통일을 주장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측은 감히 북침을 시도할 전력을 없었을 뿐더러 미국이 군사 무기를 대한민국의 거의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방어조차도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무기를 많이 주었다가는 북으로 밀고 올라가 미국과 소련 간의 전쟁으로 확전 될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지원을 하지 않았던 반면 소련은 북한에게 소총 1만 5 천정을 지급했고 야포 140여 문, T-34 전차, 87대와 항공기 100대가량을 북한에게 지원해줍니다.
소련 입장에선 얼마 되지 않는 무기이지만 전차가 단 한 대도 없던 한국군 입장에서 87대의 탱크는 정말 압도적인 전력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병력 또 시간이 갈수록 규모가 축소되고 있었기에 한국은 점점 불안감에 휩싸여 갔지만 북한은 이 전력을 갖고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많은 자본과 군수품들을 지원해줬고 김일성 정권 자체가 무너지지 않게 모든 것을 도와준 소련에게 북한의 김일성은 주기적으로 접촉해 남침을 해도 되는지 지속적으로 허락을 구했습니다. 모든 것이 소련의 덕분에 김일성은 자신만의 왕국을 꾸밀 수 있었기에 전적으로 소련의 지시에 따라야만 했었던 거죠.
하지만 소련은 북한에게 조금 더 기다렸다가 확실히 남측을 몰살할 수 있을 때까지 기회를 엿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소련은 중국도 북한을 지원하게 만들어 단숨에 한반도를 공산화시키려고 판을 짜게 됩니다. 이때부터 미국과 소련의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북한에게는 엄청난 기회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소련의 핵개발 성공과 애치슨 라인 선포
북한 입장에서는 알 수없는 이유로 갑자기 남쪽에 있던 미군들이 빠지기 시작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인데요.
1949년 4월부터 미군은 점점 한반도를 떠나더니 총 4만 5000명의 주한미군이 1949년 5월 28일 고작 500명의 장교급 군사 정도만 많이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당시 북한군의 규모는 20만 명이었고 남측은 1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군의 수적 열세를 미군 5만 명이 든든하게 채워주고 있었지만 주한미군 철수를 인해 군비의 균형이 깨져 버리게 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좀 더 신중을 기합니다. 한국에 당장 미군이 없다고 하더라도 바로 옆 일본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인 데다 전쟁이 나면 미군이 참전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던 것이죠.
만약 미국이 참전하면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소련은 핵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미소 간 전쟁이 발발하면 소련은 완전히 짓밟힐 수 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스탈린은 소련이 핵을 개발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립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49년 8월 29일, 소련은 히로시마 원폭의 2배에 가까운 위력이라는 원폭실험을 성공하게 되고 드디어 소련도 미국에 꺼낼 수 있는 카드가 생기게 되었지만 북한의 남침에 대해서는 이제 김일성은 빠르게 남침하면 한반도의 수일 이내로 공산화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소련은 조금 더 침착하게 사태를 바라봐야 한다면서 더 기다리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여기서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나는데, 미국이 1950년 1월 12에 애치슨 라인을 선포한 것입니다. 애치슨 라인이란 미국이 선포한 동북아시아의 극동 방위선으로 이 선은 미국이 죽음을 불사 더라도 지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선포인데 이상하게도 여기에서 대한민국이 빠져 있었던 것이죠. 이 라인은 일본까지도 걸쳐 있었지만 한국은 공격을 당해도 미국이나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 해 보이는 선포였던 것이죠.
애치슨 라인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
애치슨 라인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 애치슨 선언)은 1950년 1월 12일에 발표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에 의해 발표된 선언이다. 여기서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은 그 선언에서 발표된 미국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극동방위선을 의미한다. 1950년 1월 10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비밀회담에 참석한 애치슨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말하였다. 이틀 후(1월 12일), 외교위원장 톰 코널리는 이를 대외에 발표하였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하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지역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방위선에서 사실상 제외되었다. 이 선언은 중화민국 정부가 국공내전으로 인하여 타이완으로 천도(국부 천대) 한 것에 대한 미국 조야의 충격을 반영한 것이다. 더욱이 한반도는 당시까지만 해도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하게 됐다는 것이 후일의 평가다.
애치슨의 이 같은 선언 이후, 대한민국의 임병직 외무부 장관은 즉시 주한 미국 대사인 존 무초를 불러 애치슨 선언의 진의를 해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장면 대사에게 훈령을 보내 애치슨 발언의 경위를 신속히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애치슨은 한국이 미국의 극동 방위권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해 한마디 회답도 보내주지 않았다.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애치슨의 선언에 그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참조: 위키백과
이를 계기로 인하여 소련은 잠정적으로 북한의 남침을 허락하지만 중국이 이 전쟁에 동의하고 북한의 지원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는데 이것은 전쟁 승인의 책임을 중국에게 떠 넘기려는 의도와 미국이 배우를 밝혀낸다 하더라도 세계대전으로 번지지 않게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이 서로 내전에 벌이느라 바빴으나 이후 1950년 5월 1일의 내전을 끝내고 중국은 북한에게 군사 지원을 약속합니다. 북한은 이제 마음 놓고 전쟁의 시작할 차례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미국의 행동이 마치 한국을 돕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만들어 주었기까지 했으니까요.
남침으로 시작된 6.. 25 전쟁과 미국의 대처
그렇게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고도로 훈련된 병력과 소련에게 지원받은 전차를 모두 이끌고 남침을 게시했으며 그저 평온한 일요일을 보내던 한국은 제대로 대응 한번 하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은 정확히 2시간 26분이 지나서 이 사실이 미국 국무부에 전달되었고 워싱턴은 자정으로 넘어가던 늦은 저녁에 발칵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과 많은 장관들이 휴가를 떠나 있었지만 신속한 지휘 시스템을 통해 금방 트루만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게 되며 트루먼은 급히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고 동시에 저녁식사 겸 국가안보회의를 수집합니다.
저녁을 먹으며 그들은 한국을 도와줄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트루만 대통령은 분명히 북한의 배우에 소련이 있다고 확신을 했고 북한이 단독적으로 벌린 한반도에 전쟁이 아닌 소련이 미국 세력을 견제하는 전쟁으로 바라봤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미국이 약하게 대응하면 소련의 세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마침내 미국과의 핵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 여겼습니다. 먼저 소련이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미국과 한판 제대로 붙어 보고 싶어서 인지 알아봐야 했습니다.
만약 저런 속내라면 유럽 전역을 비롯해 소련과 인접한 모든 지역에서 소련과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정도의 전면적인 충돌은 다행히 아니었던 것이었죠. 미국은 한반도에서만 벌어지는 문제라는 것을 인식한 뒤 곧바로 참전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트루만 대통령이 참전을 결정한 것에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째 소련의 세력 팽창이 이어지면 미국을 위협할 수밖에 없으니 지속적으로 견제해야 한다.
둘째 지금 미국이 약하게 대응하면 한국은 물론 다른 미국의 동맹국에게 조금씩 군사적 도발을 하면서 괴롭힐 것이다.
셋째 한국을 본보기로 다른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지켜줄 것이라는 확신 해줘야 한다.
이렇게 3가지 의 이유로 미국은 신속하게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군은 독단적으로 6.25에 투입된 것이 아닌 국제연합의 형태로 수많은 나라와 함께 대한민국을 지원했습니다. 그렇게 미국이 대한민국의 보낸 병력은 정말 엄청났는데 연간 30만 명이 훌쩍 넘는 병력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한 번이라도 한반도 땅을 밟은 사람을 합하면 무려 17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병력이 참전한 덕분에 부산의 제외한 모든 지역을 빼앗겼던 우리나라는 금세 국토를 회복하고 전세를 역전시켜 버립니다. 미국과 국군은 그대로 북으로 밀고 올라가서 한반도를 당일 국가로 만들어 버리고 자 했으나 100만이 훌쩍 넘는 중공군 무리가 인해 전술을 필두로 되고 참전해 다시 전세를 바꾸었습니다.
이로 인해 38도선 부근에서 산 하나를 뺏고 뺏기는 지옥 같은 고지전을 오랫동안 지속해오게 되었고. 한 뼘이라도 더 넓은 땅을 얻기 위해 우리나라와 유엔군 참전 용사들은 피를 흘렸고 지금의 우리나라가 만들어졌습니다.
만약 미국이 진정으로 한국을 생각하는 것을 기반으로 우리나라를 도와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래도 소중한 목숨을 걸고 함께 써준 미국이 대한민국의 은인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작게 보면 한 민족의 비극이지만 크게 보면 지구를 놓고 패권 경쟁을 하던 안타까운 전쟁이 바로 6.25 전쟁입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모든 국군 참전 용사와 유행 군 참전 용사 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표합니다.
이렇게 미국이 6.25 전쟁에서 우리나라를 도와준 이유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학교에서 편향적인 교사로 하여금 한국의 근대사를 잘못 알고 있는 세대들이 제대로 알고 있었음 하는 마음에서 글을 써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