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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문화 및 역사

국민의 96% 노비인 조선은 망 할 수 밖에 없는 나라 이완용

우리는 역사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일본에게 역사를 왜곡한다고 말하지만 한국은 너무 뻔뻔해서 더 이상 왜곡할 수 없습니다. 명나라 때 중국은 조선의 처녀들을 원했고, 중국의 속국이었던 조선은 중국이 원하는 대로 바쳐야 했습니다. 조선의 여자들도 끌려가지 않기 위해 자해를 하거나 목숨을 던졌습니다.

 

조선은 중국이 원하는 대로 해야 딸이 끌려가는 것을 본 부모들이 그 자리에서 통곡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공주로 희생된 사람이 150명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적인 장소로 받아들인 공주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국민이 굶주림에 죽을 수 있는 조선

그런 만큼 조선이 유일하게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자국민을 노예로 팔아 무역을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조선은 1392년 이성계의 쿠데타로 건국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자멸적인 나라였고, 나라의 절반 이상이 노예, 즉 노예였습니다. 이성계가 집권한 후, 이 씨 가문을 제외한 고려의 왕족과 충신들도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조선의 호적,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많은 책들과 같은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의 증언에 의해 쉽게 발생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우리는 그들이 단지 아름답게 꾸미고 꾸미기에 바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언론에서 조선은 지상낙원이나 상당히 안정된 나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1997년에는 북한의 차남 황장엽이 월남하여 북한 주체사상을 확립하고 북한 정권에 반기를 들고 남한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북한의 전략 중 '갓끈 전술'을 언급했는데,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끈이 끊어지면 한국이 고립돼 침략당할 수 있다는 조언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1976년 간첩 3인조가 동료 간첩 2명을 살해한 뒤 도주한 김용규는 2013년 '김일성의 비밀 가르침'을 펴냈습니다.

 

이 책은 부록이지 책이 아니며 김용규가 죽은 뒤에 한광덕 국방대학원장이 생전에 읽으라고 준 자료를 출판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여러 출판사를 다니며 출판하려 했지만 모두 거절당해 실패했다고 합니다. '비밀의 가르침'이라는 책의 내용 중 "아직 미숙한 초·중·고등학생은 어릴 때부터 색칠을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통제해야 합니다." 또 "강한 나라, 즉 약한 나라의 기대를 뿌리 뽑아 강대국(미국, 일본)에 비인간적인 각종 범죄가 드러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한 손에는 권총이라는 용어를, 다른 한 손에는 측정기라는 용어를 적어도 한 번은 들어봤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아리랑에는 왜군이 권청과 함께 땅을 쏴 죽였고, 사상자는 4천여 명으로 기술돼 있습니다. 이 값이 참이면 관성 기록, 증거 또는 연구 데이터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너무 구식이고 비공식적이지 않나요?"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1945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끝났으면 다시 이 땅을 찾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이것도 이 땅에 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얼마나 황당한지 알 수 있어요.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제대로 된 토지조사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최근까지 일본에서 나눠온 거리 주소와 주소를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분단국가에 오는 왜곡된 좌파 성향

]1943년생으로 아리랑을 쓴 조정래 작가는 전라도 순천 출신으로 책을 통해 이승만을 부정하고 소련군과 북한군을 미화하는 좌편향 작가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조정래가 한국어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면서 우리가 배운 역사가 얼마나 왜곡돼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이유는 을사오적 이완용이 넘겨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05년 11월 10일, 일본은 조선의 26대 왕인 고종에게 조선의 외교권을 요구한 일왕의 뜻을 전하기 위해 특사인 이토 히로부미를 보냈습니다.

 

조선은 이미 자멸적인 나라였고, 국력과 국고를 바닥에 두고 폐허가 된 나라였습니다. 일본이 아니더라도 러시아나 중국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이에 고종은 백성들과 상의할 필요가 있다며 회담을 피했고, 일본은 왜 백성들과 상의할 필요가 있느냐며 왕조를 모욕했습니다. 모든 권력은 전주 이 씨가 쥐고 있었고, 모든 것은 그들이 켜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말한 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11월 17일, 일본은 고종에게 다른 회의를 열 것을 요청했지만, 고종은 대신 아프다는 핑계로 을사에 다섯 명의 적군을 보냈습니다. 이곳에는 고종실록에 8명의 관리가 있지만, 편의상 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을사오적과 잘 타협하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나라를 양도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18일 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밤늦게 협정을 맺는데 얼마나 피곤하시겠어요?"

 

이 소식을 들은 귀족들은 황제가 끝까지 저항했지만, 을사오적이 나라를 팔았다며 고종을 비난했습니다. 이 소식은 사실 확인도 없이 조선 언론사와 영국 언론사에 퍼졌고 기정사실이 돼 역사적 사실이 됐습니다. 당시 이완용은 을사 5 연대 중 현직 장관급이어서 국가에 관한 조약을 임의로 이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완용이 아무리 강력해도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는 한 핸들 왕국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고종을 대신해 임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만약 이완용이 고종에게 임관을 강요받았다면 일본 측은 이완용과 단둘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조선을 감시하는 상황에서 조선의 왕으로부터 확실하고 확실한 조약을 맺어야 했기 때문에 무허가 대리인과 조약을 맺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일본 천황'이라는 표현을 쓴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친서를 통해 완전한 일본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실의 압박을 받으며 살아온 백성들의 오랜 축적을 폭발시킨 임오전쟁과 동학농민운동은 이를 막지 못하고 자신들의 혁명운동으로 판단하고 간섭 없이 지켜본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그것은 일본 박테리아에 의한 학살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그 결과, 민비는 죽임을 당했고 고종은 러시아로 도망쳤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했는지 알 수 있는데, 외국문화의 조기 수용의 상징인 김구파와 이승만으로 나뉘고, 몰락한 귀족가문의 후손인 김구 파는 독립운동의 본질이 남다릅니다.

 

그리고 김일성의 북쪽 공산주의 이념이 자기차별이 약한 젊은 운동가들에게는 그럴듯한 국가체제로 들릴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1591년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자 이를 환영한 백성들의 기록이 백성들의 기록에 기록되어 양반들의 착취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고, 나라에 대한 애국심도 없었습니다.

 

또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붙잡혀도 일본 근대사를 접하고도 돌아오지 않았고, 도자기 제조업자들이 노력한 만큼의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일본에 머물고 싶어 했다는 사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라는 팔렸지만 나라는 빼앗겼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상식의 한 부분입니다. 딸이 공주로 끌려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조선왕조가 새롭게 거듭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랫동안 타국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은 1945년 독립했고, 1954년에는 우리처럼 땀과 북으로 나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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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및 이미지 출처: 인사이트, 나무 위키, 위키백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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